아름다운 음악

[스크랩] 샌드페블스(Sand Pebbles) - 나어떡해

거북아 2012. 6. 9. 09:06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실황

 

 

 

1978년 제2회 대학가요제 초청공연실황

 

 

 

 

 

윤민수, 나는 가수다(2011.12.11)

 

 

에일리, 불후의 명곡(2012.5.5)

 

 

TOXIC(톡식), TOP 밴드(2011.09.10)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
나 어떡해 너를 잃고 살아갈까
나 어떡해 나를 두고 떠나가면
그건 안돼 정말 안돼 가지 말아
누구 몰래 다짐했던 비밀이 있었나
다정했던 네가

상냥했던 네가
그럴 수 있나
못 믿겠어 떠난다는 그 말을
안 듣겠어 안녕이란 그 말을

다정했던 네가
상냥했던 네가
그럴 수 있나
못 믿겠어 떠난다는 그 말을
안 듣겠어 안녕이란 그 말을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나 어떡해

 

 

 

 

제1회 '77 Mbc 대학가요제 1집 (1978 Hit레코드)

샌드페블즈 Sand Pebbles 6기 (1970 -)

 

Side A.1 - 나 어떻게 (작사, 곡:김창훈)

Introduction

샌드페블즈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77년 MBC에서 주최한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하면서 부터이다. "나 어떡해"로 대상을 수상한 샌드페블즈는 대중가요의 흐름을 일거에 변화시키는 엄청난 동력을 부여하였다. 이후 80년대까지 그룹사운드의 전성기를 열어준 출발점이 샌드페블즈의 공헌이라 할 수 있다.

70년대의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던 청년문화는 유신시대의 저항정신을 대변하였다. 한대수, 김민기, 서유석 등으로 대표되던 통기타 가수들은 그 저항정신으로 말미암아 금지곡이 되거나 가수 활동 자체를 포기해야 했다. 더구나 70년대 말에 터진 대마초 사건으로 신중현, 조용필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류 가수들이 활동금지를 당하게 되면서 청년문화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 자리를 트롯트가 대신하게 된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열정과 젊음을 밖으로 내뿜을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으며 바로 그런 시기에 샌드페블즈는 다가왔다. 그들이 내뿜는 사운드는 가히 폭발적이었으며 전율스런 충격이었다.

한국에 본격적인 록사운드를 도입하고 체계화한 사람은 신중현이며 그 음악적 완성도는 이미 70년대 중반에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련된 음악적 완성도를 이룩한 신중현은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활동금지를 당하고 있었으며 이후 뚜렷한 록사운드를 재현하는 그룹이 없는 시기에 샌드페블즈는 폭발적인 굉음을 지르며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 냈다.

샌드페블즈는 대학생 그룹이다. 또한 그들이 지향하는 모토가 기성가요를 흉내내지 않고 대학생이 표현할 수 있는 순수한 음악을 지향하고자 했기에 거친듯 하면서도 순수하고 파격적인 사운드의 표출이 가능했으며 이는 곧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갈구하던 억압된 상황에서의 탈출과 창조의 욕망과 일치하였다.

샌드페블즈의 순수한 음악정신을 이어가고자 대학생활 중 2학년 한해만 활동하고 이듬해에 신입회원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며 그들이 지향하던 음악정신은 이후 30년간 샌드페블즈의 근간이 되었고 김창완, 김창훈, 김창익 삼형제로 구성된 산울림의 음악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출처 : http://blog.daum.net/1413/3128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 대상곡
작사 작곡 : 산울림 김창훈
영상 :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 실황 동영상
음원 : 제1회 '77 대학가요제 1집 오리지날 버전 (Hit 레코드, 1978)
지금까지 이 코너를 계속 봐온 독자들이라면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말을 발견했을 것이다.
바로 '대마초 파동'과 '가요정화운동'이다. 이 말들이 지금까지의 글들에 거의 모두 등장했다는 건 그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1970년대 대중음악계에 가장 크고 강력한 영향을 끼친 건, 음악인이 아니라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고 이 나라의 어처구니없는 정책이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정책은 1970년대 중후반의 대중음악계를 공백으로 만들어 놓았다. 남아있는 음악인은 몇 없었고, 그나마 발표되는 노래들은 심의에 의해 난도질되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1977년 처음 열린 대학가요제는 정부와 대중음악계 모두의 필요에 만들어진 행사였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대학생들의 건강한 이미지를 이용해 대중들의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었고, 대중음악계의 입장에서는 공백 안에 집어넣을 새로운 얼굴들이 필요했다. 대학가요제는 그렇게 '관제행사'라는 오명 속에서 실제로 젊고 재능 있는 음악인들을 배출해낸 희비극의 현장이 되었다.
1977년 9월, 정동에 있던 문화체육관에서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며 첫 대학가요제가 열렸다.
그날의 주인공은 샌드 페블즈(Sand Pebbles)였다.
샌드 페블즈는 1970년 처음 결성돼 이수만(2기)과 산울림의 김창훈(5기) 같은 음악인을 배출해낸 서울대학교 농대의 캠퍼스 밴드였다. 김창훈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후배인 6기 샌드 페블즈에게 대학가요제 참여를 권유한 이도, 또 대상 수상곡인 '나 어떡해'를 만들어준 이도 김창훈이었다(김창훈 역시 형 김창완과 함께 '문 좀 열어줘'로 참여했지만 졸업생이었던 김창완의 신분 때문에, 혹은 '문 좀 열어줘'를 이해하지 못한 심사위원들 때문에 떨어졌다는 뒷얘기가 있다).
대학가요제라는 행사 자체도 그랬지만, 샌드 페블즈의 대상 수상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각 대학마다 하나씩은 있었던 캠퍼스 밴드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처음 알린 의미가 가장 컸다. 그 전까지 대중들이 알고 있던 그룹사운드는 야간업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프로페셔널한 집단이었다.
그렇기에 캠퍼스 밴드들은 대중들이 알고 있던 그룹사운드의 능숙한 연주력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숙했고 지극히 아마추어적이었다. 가요제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 밴드 송골매가 음악생활 내내 가졌던 연주력에 대한 열등감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하지만 샌드 페블즈라는 캠퍼스 밴드에겐 아마추어리즘이 주는 풋풋함과 순수함이 있었고 대학생 특유의 건강함이 있었다. 거기에 김창훈이 만들어준 곡 자체의 매력이 있었다. 첫 행사에 김창훈 같은 뛰어난 음악인의 노래가 제출되고 또 대상까지 받게 된 건 '신의 한 수'였다. 대학가요제와 샌드 페블즈, 그리고 '나 어떡해'는 대회 다음날부터 대중들의 입과 귀에서 계속해서 오르내렸다.
이 놀라운 반응은 이후 일반 대학생들뿐 아니라 각 대학의 캠퍼스 밴드들이 각 가요제에 앞다퉈 참여하게끔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듬해 항공대학교 밴드인 활주로로 해변가요제에 참여하며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되는 배철수의 이 증언은 그래서 중요하다.
샌드 페블즈는 의도치 않게 캠퍼스 밴드 출신들의 그룹사운드 전성시대를 열게 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더 넓게는 각 대학에 있던 재능 있는 청년들을 가요제 무대로 이끌었다.
한번 뒤집어진 청년문화의 또 다른 시작이었던 셈이다. 가요제를 통해 등장한 음악인들의 이름과 노래들을 일일이 거론하진 않겠다. 그들은, 그리고 그 노래들은 그렇게 대중가요계의 공백을 하나둘 메워갔다.

 

보다 | 김학선 (보다 월간 [보다] 편집장)

 

 

 

 

태어나게 된 계기

Sand Pebbles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를 나의 기억으로 되살려 보면, 1970년 가을 장세권과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연습하던 때로 거슬러 간다. 당시 우리는 서울대학교 신입생들로서 교양과정부의 같은 반에 속해 있었는데, 세권은 취미로 통기타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 당시 국내 가요계에는 아직 통기타 붐이 일기 이전으로 송창식씨와 윤형주씨의 Twin Folio가 활동하고 있을때였다. 내가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들은 세권이 제안하여 우리는 매일 세권의 하숙방에서 함께 기타연습과 함께 노래를 연습하곤 했다. 우리의 계획은 장차 수원에 있는 서울대학교 농과 대학으로 가게되면 그곳에서 통기타 듀엣으로 활동 하는 것이었다.


해가 바뀌고 새 학기가 되어 수원으로 가게 되었다. 농대 학생회에서는 서울에서 온 후배들을 환영하는 행사를 배풀었다. 행사중 인기를 끈 것이 장기자랑이었는데 이를 위해 세권과 나는 기숙사에서 Simon 과 Garfunkel의노래로 많이 알려진 "Bye Bye Love"를 열심히 연습하였다. 그러던 중 우리의 노래소리를 들은 윤장배가 우리 방으로 찾아와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장기자랑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장배는 이러한 성과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장배는 이미 group sound를 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 대학생활중 그룹사운드를 조직하여 연주활동을 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그룹사운드를 조직하자는 장배의 제안에 시끄러운 소리, 퇴폐적인 행색등 group sound에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던 세권과 나는 한마디로 거절 하였다. 그러나 매일 우리방으로 찾아와 설득 하는 장배의 열의와 한편으로 새로운 음악에 대한 호기심에 의해 우리는 장배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것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아직도 자신있게 말 할 수는 없다. 다만 그 결정의 결과로 나를 비롯한 여러 Sand Pebbles를 거쳐간 회원들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으나 한편 우리는 Sand Pebbles를 통하여 형제와도 같은 동기들과 선후배간의 강한 유대감을 경험 하였고, 제1회 MBC대학가요제 대상 수상등 그 동안의 업적과 함께 국내 어느 대학에서도 볼 수 없는 20년을 꾸준히 이어온 전통의 대학 group sound를 가지게 된것이다.

인원구성
새로운 group sound의 결성을 결정한 우리는 교내에서 게시판의 공고나 수소문을 통하여 함께할 사람을 구하였다. 먼저 고등학교 시절부터 리드기타를 연주한 김동만이 합류하였고 이어 drum을 연주하는 이남묵과 서울고등학교 취주악대장을 지낸바 있는 saxophone을 연주 하는 정학상이 들어오게 되었다. 따라서 세권이 리듬기타를 , 장배가 베이스를 맡고 특정한 악기를 다루지 못하는 나는 노래를 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수원에 떨어져 있고 학생수도 많지 않은 농과 대학에서 악기를 다를 줄 알고 group sound활동을 원하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짧은 시일 안에 기타와 드럼등 각 부분을 맡을 능력있는 회원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만들어진 과정
연습할 장소가 따로 없어 저녁마다 우리는 내 기숙사 방에 모여 함께 연습하였다. 비록 일렉기타가 아닌 통기타이고, 드럼도 아직없어 책상 바닥을 두드리며 연습하였지만, 연습시간은 항상 완벽한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한 열의에 차있었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 늦게 까지 이어지곤 하였다. 한달쯤 뒤 우리는 대학측과 교내 연극반의 배려에 의해 농과대학 강당을 연습장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밤 늦게 까지 시끄러운 우리들의 연습을 같은 강당을 사용하던 연극반원들, 주위연구실의 교수님이나 학생들, 직원들이 용납해주어 우리는 마음껏 연습에 열중 할 수 있었다. group의 이름은 사흘간의 열띤 경합 끝에 남묵이 내어 놓은 "Sand Pebbles"가 만장 일치로 결정되었다. 이 이름은 발음이 명확 하였을 뿐 아니라 전원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농과 대학group sound의 이름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또 한 이 이름은 스티브 맥퀸과 캔디스 버겐의 "산 파블로"의 영어 이름으로, 그 영화가 가진 낭만적인 분위기를 이름으로 가지고 있어 모두가 찬성하였다. 한편 우리는 악기 구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각자의 악기는 자신이 구입할 것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amplifier등 비싼 부품을 사기 위해 회원각자가 일부 부담하고 또한 경복, 중앙, 경동, 서울고등학교 동문회등과 대학 학생회로 부터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남묵이 가장 먼저 드럼을 사온날 , 우리는 꿈이 이루어지는것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기뻐하였다.

활동
group이 모아진 후 얼마되지 않아서 우리는 여러 교내 행사와 교외 행사에서공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대학생 group sound라는 것을 전혀 접할 수 없었던 농과대학과 수원에서 Sand Pebbles가 일으킨 반응은 대단하였다 . 연주장소로 주로 농과대학 강당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객석 1,200의 강당은 연주회때마다 교내외의 관객으로 만원을 이루었고 일부 공연에선 자리가 모자라 공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교내 학우들 사이에도 인기가 있어 공연이 아닌 저녁 연습시간에 우리의 연습장소인 강당에 관객(?)들이 여러명 앉아 우리의 연습을 지켜보곤 하였다. 기억에 남는 공연은 수원 적십자사와 함께한 자선공연, 전국 농업고등학교 경진대회 참가자들을 위한 위문공연등이 있다 . 각종 농과대학내 행사와 함께 우리는 서울대학교 전체 행사 및 교외 행사에도 많이 참가하였다 . 서울대학교에는 그 당시 문리대에 Extas, 공대에 Echos등 이미 많이 알려진 group sound들이 있었으나, 활동이 활발치 못하여 태어난 후 돌도 아직 지나지 않은 우리가 서울대 전체 학생회의 행사에 참가하곤 하였다. 이것은 또한 우리 Sand Pebbles가 그만큼 활발하게 연주활동을 한 때문이기도 하였다. 기억에 남는공연은 여름 서울대 ROTC 병영훈련을 위한 위문공연, 겨울 25사단에서의 장병 위문공연, 서울대학교 전체 여학생회 축제에서의 공연들이 있다. 기억에 남는 추억들로는, 우리의 첫번째 debut공연이 있던날 낮에 마침 농대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나 공연이 이루어질까 걱정을 한 장배가 우리 Sand Pebbles회원들이 나서서 시위를 막아보자고 해 모두가 실소한 일, 돈이 없어 값싼 중고악기를 산 탓에 연습도중은 물론 공연 중에도 악기가 고장이 나 애를 태우던 일들이 기억난다. 초기의 어떤 공연에서는 리드기타의 줄이 끊어져 급히 수원시내로 나가 줄을 사오느라 공연을 20여분간 중단한 사건도 있었다. 회원중 세권이 전기, 전자제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공연중의 악기고장은 물론, 평소 연습시의 고장과 악기에 필요한 부품을 구입하는 데 말로 다 할수 없는 큰 도움을 주었다.

초기 Sand Pebbles의 특성
지나놓고 보니 Sand Pebbles가 태어난 첫해부터 짧은 기간내에 제 모습을 갖추고 국내 어느 대학의 group sound에 못지 않은 기량을 가지고 활동을 한데는 몇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원인에 의해 지난 20년간 꾸준히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고 Sand Pebbles가 국내 대학생 가요문화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첫째의 원인으로는 우리가 가질수 있었던 충분한 연습시간이다. 농과대학은 수원에 있음으로 해서 대부분 회원들이 집을 떠나 대학내의 기숙사나 학교주변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저녁시간을 가족이나 다른 친구들과 보내는 대신 온전히 연습에 몰두할 수 있었다. 둘째로 같은 원인에 의해 우리는 동기와 선후배간에 가족과도 같은 짙은 유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 짐작이 가겠지만 group sound란 함께 연습과 연주를 하는 동안 회원 서로간에 많은 불만을 낳게 한다. 상대방의 연습태도, group의 음악의 방향, 경제적인 문제, 때론 오랜 연습으로 피곤해 진 몸에 감정이 날카로워져 사소한 문제에도 대립이 되곤 하는데, 우리의 경우 함께지내는 시간이 많음으로해서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같다! . 그 밖에 우리는 나름대로 몇가지의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첫째, 우리는 Sand Pebbles가 대학 group sound로서의 순수함을 지켜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지나치게 기성음악이나 가수의 흉내를 내는 것을 지양하고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대학생의 음악을 연주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도가 대학가요제나 김창완, 김창훈 형제들의 산울림의 음악으로 이어졌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 둘째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2 학년 1년간만을 Sand Pebbles로서의 활동을 하고 모든 것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하였다.따라서 우리가 구입한 악기는 아깝긴해도 후배들에게 모두 무상으로 주기로 하였다. 후배들은 사정이 닿는대로 노후한 악기를 보다 성능이 좋은 악기로 교환하였다. 또한 선배중 한사람은 후배들의 살림살이를 맡고 또 후배들의 연습 및 공연에 선배들이 적극참여함으로 해서 Sand Pebbles의 음악에 대해 선배들이 관여하도록 하였다. 셋째 이러한 Sand Pebbles의 특성때문에 우리는 후배회원의 선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후배회원의 요건으로 연주 능력이나 음악적 감수성들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도 우리는 연습을 꾸준히 참가할 수 있는 성실성과 동기나 선후배와 잘 어울릴 수 있는 인간성을 더 중요시 하였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선배의 후배에 대한 일방적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후배 상호간 많은 토론과 이해함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자부한다. 지나온 20년을 회고할때, 농과대학에서 무슨 퇴폐음악이냐고 천덕꾸러기로 구박을 받던 우리 Sand Pebbles가 이제 서울농대하면 사람들에게 Sand Pebbles를 생각하게 할 만큼 성장한것은, 우리가 우수한 연주자를 가지고 있었다거나 좋은 뒷받침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실은 Sand Pebbles를 거쳐간 수많은 회원들과, 이들을 도와준 많은 이름없는 학우들의 수고, 그리고 학교당국의 끊임없는 도움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Sand Pebbles를 사랑해준 모든이와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스무번째 생일을 축하하고 싶은 것이다.

-1대 주대명 선배님께서 89년에 써 주신글

 

연혁

 
*1970 샌드 페블스 창립
*1977 제 1회 MBC 대학 가요제 대상 수상 - 나 어떡해 (6대)
*1985 유니세프 가요제 금상 수상 - 넌 영원한 소녀 (13대)
*1985 창립 15주년 기념 대공연 - 호텔 롯데 (크리스탈 볼룸)
*1986 수원시주최 문화공연 - 수원시민회관
*1987 문화 관광부 주최 4개 대학 그룹 사운드 합동 전국 공연 - 장충단공원, 대학로, 광주 광역 시청 앞 광장
*1987 제11회 MBC 대학 가요제 본선 진출 - 내 슬픔에 웃는 너의 미소를 (15대)
*1989 창립 20주년 기념 대공연 - 호텔 롯데 (크리스탈 볼룸)
*1993 제17회 MBC 대학 가요제 동상 수상 - 너를 바라보는 건 (21대)
*2001 창립 30주년 기념 대공연 - 패션 몰 메사 (메사팝콘 홀)
 
현재 총156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종 민관 행사 및 대학 축제, CF출연 등 30년간 약 1천여회의 공연을 수행 매년 1회 정기 공연 후 당대 활동을 신입 회원에게 인계하며 홈 커밍 데이 및 송년회 등을 정기적으로 갖고 선후배와 가족들의 일체화를 도모

출처 : http://www.sandpebbles.net/

출처 : 길 위에 흐르는 음악
글쓴이 : 호크아이(이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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